▲ '황금발'을 앞세워 23년 현역 생활을 마감하는 이동국, 28일 은퇴 기자회견에서 풋 프린팅으로 족적을 남겼다. ⓒ연합뉴스

[스포티비뉴스=전주, 이성필 기자 이강유 영상 기자] 2002 한일월드컵 최종 명단 탈락, 2006 독일월드컵을 두 달 앞두고 끊어진 무릎 십자인대로 인한 출전 좌절, 2007-2008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미들즈브러에서 중용되지 못하고 2008년 K리그 성남 일화로 복귀했지만 사라진 존재감.

공통점은 독기와 끈기로 편견을 견디며 정면 돌파했다는 점이다. 28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현역 은퇴 기자회견을 통해 오는 11월 1일 대구FC와 K리그1 27라운드로 현역 생활 마감을 알린 '라이언킹' 이동국(41, 전북 현대)의 지난 23년이었다. 

이동국에게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좌절과 고비들이 많았다. 1998년 포항 스틸러스를 통해 프로에 데뷔, 같은 해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에서 객관적인 실력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0-5 대패를 목도하는 상황에서도 호쾌한 중거리 슈팅 하나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 국내 무대에 고종수(42), 안정환(44)과 함께 트로이카로 팬을 몰고 다녔던 그다.

하지만,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게으르다"는 지적과 함께 최종 명단에 오르지 못했던 이동국이다. 한참 기량이 물이 오르던 시절, 명단 제외 후 대표팀은 4강 신화를 썼고 '병역 혜택'까지 맛봤다. 같은 해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결승 진출에 실패하면서 그는 광주 상무를 통해 병역 의무를 이행했다.

상무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 이동국은 2006 독일월드컵은 무조건 나선다며 이를 갈았지만, 무릎 십자인대 파열 부상으로 승선하지 못했다. 광고에서 구슬픈 목소리로 동료들을 응원하는 그의 모습은 처연함 그 자체였다. 그가 없었던 대표팀은 원정 월드컵 첫 승을 거두는 기록을 만들었지만, 16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5년여의 긴 시간은 이동국에게 분명 아픔이었다. 그 역시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대해 "2002 한일월드컵에서 뛰지 못했을 때다. 그때 심정을 기억하면서 살다 보니, 지금까지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잊지 못할 기억이다. 또, 2006년 독일월드컵을 두 달 앞두고 다쳤을 때도 최악의 순간이었다. 2002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준비했는데 부상으로 뛰지 못했다. 경기력으로만 보면 가장 완벽한 해였다"라며 좌절을 발판 삼아 앞으로 나가는 원동력으로 삼았음을 숨기지 않았다.

▲ 축구 인생의 후원자이자 동반자였던 부모님 이야기에 참다 눈물을 쏟은 이동국 ⓒ연합뉴스

이동국이 30대 중반을 넘어 현역을 이어가기 전까지 한국 축구 문화는 '선배의 용퇴'가 미덕이었다. 30대 중반 이후에는 팀에 부담을 준다며 구단의 보이지 않은 압박에 떠밀리듯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동국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30대 중반을 넘기면서 매년 "은퇴는 언제 하나요"라는 물음이 꼬리표처럼 붙었다.

오히려 은퇴 부담을 즐긴 이동국이다. 그는 "이번에도 선수들 단체 모바일 메신저에서 은퇴한다고 말하니까 믿지 않더라. 최근 5~6년 동안 후배들에게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현실이 될 줄 몰랐다더라"며 웃었다.

이어 "롱런한 비결은 멀리 보지 않고 당장 앞 경기만 보고 지내온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노장이니까 못한다는 생각이 아닌 파이팅해서 (경기 준비에 집중) 하다 보니까 나이를 잊고 살았다. 그게 원동력 같다. 저도 제 나이를 들으면 깜짝깜짝 놀란다"라며 숫자에 메이지 않고 눈앞의 목표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한 것이 현역 최고령 선수로 이어가는 힘으로 작용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당당하고 공정한 경쟁은 곧 합당한 주전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동국은 "프로 선수라는 직업은 선, 후배를 떠나서 동료와의 경쟁이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게 프로에서 오래가는 비결이다. 그러려면 단점보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장점을 상대가 따라오지 못하게 만들면 프로에서 롱런할 수 있다"라며 오랜 현역 생활의 비결을 욕심 넘치는 경쟁의식 효과로 설명했다.

힘든 순간도 다른 시선으로 버텼다. A대표팀에서의 실패라는 이미지가 워낙 짙어 K리그에서의 성공은 다소 덮이는 부분도 있다. 2010 남아공월드컵 우루과이와 16강전에서 보여줬던 속칭 '물회오리슛'이 그렇다. 골을 넣었다면 8강 진출도 가능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비판의 화살이 쏟아졌지만, 이동국은 의연했다. 그는 "저도 좌절하고 힘들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저보다 더 큰 좌절을 겪는 사람을 생각했다. 이만큼의 좌절은 더 큰 좌절을 가진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생각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왔다. 그렇다 보니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았다"라며 대범함이 있어야 큰 선수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던 이동국, 2014년 9월 베네수엘라전에서 기성용(등번호 16번), 손흥민(9번)과 축구화 닦이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이동국은 2017년에도 A대표팀에 승선한 경험이 있다. 이는 곧 정통 공격수 계보가 이동국 이후 쉽게 이어지지 않음을 뜻한다. 물론 황의조(지롱댕 보르도)가 프랑스 리그앙에서 성장 중이지만, 그를 잇는 자원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 역시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답이다. 이동국은 ""K리그와 아시아 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에서는 스트라이커로 살아남기 어렵다. 모든 팀이 외국인 공격수를 선호하고, 이는 성적과 연관돼 있다. 지금은 22세 이하(U-22) 규정으로 어린 선수들이 뛸 수 있지만, 외국인 선수와 경쟁을 이겨야 가능하다. 예전에는 (선호 포지션이) 스트라이커가 1순위였다면 지금은 윙어나 미드필더로 시작하는 선수들이 많다. 그런 부분이 안타깝다"라며 현실을 이야기했다.

물론 하기 나름이다. 그는 "구단에서는 좋은 스트라이커를 만들기 위해 출전 시간을 보장해줘야 한다. 저 역시 실력보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 성장하면서 외국인 선수와 경쟁하는 힘이 생겼다"라며 외국인 선수가 있어도 자신의 장점을 보여주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사랑받고 떠나게 되는 이동국이다. 그는 "은퇴할 때 쓸쓸히 떠나는 선수들이 많다. 이렇게 많은 분 앞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할 수 있게 해준 분이다"라며 2009년 전북 입단 당시 지도했던 최강희 감독에게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동료와의 당당한 경쟁과 실력 유지, 어려움을 이길 의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은사를 믿고 흔들림 없이 전진한 마음,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력, 일관된 경기력을 위한 자기 관리가 오늘의 이동국을 만들었다.


스포티비뉴스=전주, 이성필 기자 이강유 영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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