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도망친 여자'. 제공|영화제작 전원사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도망친 여자'(감독 홍상수, 제작 영화제작 전원사, The Woman Who Ran). 제목부터 흥미롭다. 단역까지 다 해도 11명, 단출한 등장인물 가운데 '도망친 여자'가 있다면, 그 제목이 찍힌 포스터에서 일방통행길을 거슬러 홀로 걷는 감희(김민희)일 것이다. 그 여자는 왜, 무엇으로부터 도망쳤을까.

※아래 내용에는 '도망친 여자'의 스포일러가 일부 있습니다. 

감희는 남편의 출장에 오랜만에 혼자 여행에 나섰다. 이혼 후 교외에서 사는 영순(서영화)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싱글하우스를 마련해 이사온 수영(송선미)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그리고 옛일을 사과하고 싶어하던 우진(김새벽)을 우연히 만난다.

여자들의 만남이란 먹고 마시고 말하는 일의 연속이다. 저마다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감희의 말은 늘 똑같다. 지난 5년간 남편과 하루도 떨어져 살지 않았다고, 사랑하는 사람은 무조건 붙어있어야 한다더라고, 그리고 그렇게 붙어만 있는데도 우리는 좋은 것 같다고. 하지만 얼마전 가위를 들어 긴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는 그녀는 홀로 있을 때 종종 창을 열어 참았던 숨을 쉰다.

지난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도망친 여자'는 홍상수 감독이 연출한 24번째 장편 영화이자 배우 김민희와 함께 한 7번째 영화다. 그 둘이 사랑하는 사이임을 공표한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 이후 홍상수 감독은 작품만으로 세상과 소통해왔다. 개인사를 은유하거나, 심지어 몇몇 대목을 옮겨놓은 듯한 작품을 거푸 내놨던 그는 드디어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 영화 '도망친 여자'. 제공|영화제작 전원사
이야기는 단순하다. 감희의 짧은 여정, 이렇다 할 사건 하나 없이 이런저런 대화가 무심한 척 변주되고 반복된다. 홍상수의 마력을 마주하게 되는 건 뜻하지 않은 세번째 만남, 가벼운 긴장이 일었다 풀어질 무렵이다. 빙빙 주위를 맴돌던 어떤 말이 툭 감희의 마음 어느 한 곳을 건드릴 때, 고요했던 무언가가 요동치기 시작할 때, 깨닫지 못했던 진심이 비어져나올 때다. 관객만이 비밀을 마주한다. 아무도 도망치지 않은 영화에 '도망친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뽀글거리는 단발로 나타난 김민희는 독보적이다. 그녀가 맡은 감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끌어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민희는 텅빈 마음을 스크린 앞 관객에게만 들켜버린 간단치 않은 캐릭터를 가뿐하게 또 사뿐하게 그려보인다. 그녀를 둘러싼 가볍고 나른한 공기는 그대로 '도망친 여자'에 배고, 여자들의 묘한 친밀감에도 일조한다. 그녀들이 달갑지 않은 남자를 대할 때, 그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여성이 중심에 온 영화답게 서영화 송선미 김새벽 등 감독과 거듭 작업해 온 배우들도 하나같이 생생하다. 실소와 쓴웃음을 가리지 않는 유머 포인트가 상당하며, 곱씹을수록 풍성한 영화다. "한국사람 너무해" 하는 외침은 어쩔수없이 터져나온 진심일까. 정말 홍상수 영화에선 고양이까지 연기를 잘하는 건가. 그러고보니 아무도 소주를 안 먹네!

9월 17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러닝타임 77분.

김현록 기자 roky@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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