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 미국월드컵 스페인전에서 동점골을 넣고 두 팔을 들어 환호하는 서정원(가운데) 전 수원 삼성 감독. 그의 얼굴을 잡고 좋아하는 이는 황선홍 현 대전 하나시티즌 감독

(편집자 주) 스포티비뉴스는 지난달부터 '나의 A-스토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축구대표팀 경기에 목마른 팬들을 위해 '마스크맨' 김태영(천안시 축구단 감독)을 시작으로 '조헤아' 조현우(울산 현대) 골키퍼, '진돗개' 허정무(대전 하나시티즌 이사장), '황새' 황선홍(대전 하나시티즌 감독), '왼발의 달인' 하석주(아주대학교 감독) 등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축구계 인사들을 소환해 과거 경기를 회상하고 무용담(?)도 나누고 있습니다. 축구대표팀을 흔히 A대표팀이라 부르죠. 'A'라는 단어에는 '최고', '최상위'라는 개념도 녹아 있습니다. 연재를 거듭하면서 'A'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물을 만나달라는 독자 분들의 요구가 많아졌습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그 폭을 더 넓혀 보겠습니다. 전, 현직 선수는 물론 이들의 뒷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있는 주변인까지 두루두루 만나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스포티비뉴스= 김건일 기자 이성필 기자] "저도 확인해보면 (공식 A매치로 인정받을) 경기 많을걸요."

A매치 88경기 16골, 요즘 의미를 부여하는 센추리 클럽(A매치 100경기 이상 출전)에는 끼지 못하는 '날쌘돌이' 서정원(50) 전 수원 삼성 감독에게는 아쉬움으로 남는 과거다.

하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영광스럽고 자부심 넘치는 일들도 많았다. 가만히 쉬고 있는 서 감독에게 영광스러운 과거 이야기 좀 해달라고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소나기와 가랑비가 반복하던 지난달 27일, 서울 이태원의 한 호텔에서 만나 대표팀 생활부터 해외 진출 좌절 스토리까지 복습했다.

"미국월드컵 스페인전 골, 프랑스월드컵 한일전 골이 기억에 생생"

서 감독은 측면 공격수로 빠른 발을 자랑한다. '날쌘돌이'라는 별명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정말 공간을 향해 치고 들어가는 능력은 최고 수준이다. 상황에 따라 페널티지역 안에서 상대 수비를 벗겨 골을 넣는 예술도 만든다. 

"1990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태릉 선수촌에서 훈련할 당시였어요. 훈련이 끝나고 빠르기로는 손가락에 꼽을 고정운(54), 김주성(54), 변병주(59) 선배까지 모여 100m 경기를 했었거든요. 그때 1등을 했었어요. 이때 잰 것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가 가장 빨랐을 당시 기록이 11초5 정도 되는 것은 확실해요."

100경기를 넘지 못했던 것은 서 감독에게도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 모양이다. A매치에 대한 성격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대였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마침 인터뷰를 하고 얼마 뒤 대한축구협회가 김호곤(70) 수원FC 단장, 조영증(66) 한국프로축구연맹 기술위원장, 박성화(65) 전 베이징올림픽대표팀 감독 등이 사라졌던 A매치를 찾아 센추리 클럽에 새로 가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 감독은 "저도 찾아보면 많을 거에요"라며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공격수라 팬들의 기억에 남는 골을 넣으며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서 감독은 골을 넣으면 주로 두 팔을 들고 환호한다. 1994 미국월드컵 본선 스페인전 후반 45분 2-2 동점골이 그랬고 19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전 후반 38분을 헤더골이 그랬다. 서정원의 골 이후 이민성(47. 현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의 역전골로 2-1로 승리, 기쁨은 두 배였다.

"골의 순위를 따지자면 월드컵이 1위, 그다음이 한일전이고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스웨덴전도 당연히 기억에 남아요. 2002 한일월드컵 유치하면서 만난 (1996년) AC밀란(이탈리아)과 친선경기 골도 있었고요. (선수 생활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당연히 월드컵이죠. 가장 크게 주목받는 대회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소소하게 기억이 나는 경기들이 있어요. 스트라스부르(프랑스)를 통해 유럽 진출을 했는데 첫 경가에서 첫 골을 넣은 것도 그렇고 올림피크 리옹과 경기도 기억에 남아요. 바로 연속골을 터뜨렸으니까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서 감독에게 유럽 진출 가능성을 확인한 대회였다. 대회 직전 연습 경기에서 괜찮은 경기력에 골까지 넣어주니 현지 스카우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대회가 시작해 스웨덴과 3차전에서는 골도 넣었다. FC바르셀로나와 연결되는 등 뜨거운 해를 보냈다. 흥미로운 바르셀로나행 좌절은 2편에서 이어진다. 

올림픽 2년 뒤 1994 미국월드컵은 서 감독의 기억에 오롯이 남아 있다. 모두가 염원했던 월드컵 사상 첫 승의 기회가 있었다. 스페인전에서 골까지 넣어 국제적으로 '서정원'이라는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알렸다. 그래서 볼리비아와 2차전 전망은 상당히 밝았다.

▲ 1998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 데니스 베르캄프(가운데)를 막는 서정원(왼쪽, 팔에 가려짐). 그의 오른쪽은 이민성 현 올림픽대표팀 코치

"프랑스월드컵은 한(恨)으로 남아 있는 대회"

"스페인과 1차전에 (하)석주형이 저한테 연결된 패스로 만들어진 상황에서 일대일을 골로 연결하지 못했어요. 그것을 넣지 못하고 괜히 저에게 와서 난리를 치더라고요(웃음). 그래도 볼리비아전은 이길 가능성이 컸다고 봤는데 (황)선홍이형이 컸죠. 한두 개만 잘 넣었어봐요. 이겨서 16강 갔을텐데 말이에요. 그냥 아쉬웠어요."

볼리비아전을 두고 하석주(52) 아주대학교 감독은 스포티비뉴스에 "(황)선홍이가 *볼만 차지 않았어도 이겼다"라며 웃은 바 있다. 황선홍(52) 대전 하나시티즌 감독도 "(그게 참 희한했죠. 그냥 제가 다 못해서 그런 거에요"라며 회상해 서 감독이 전가한 책임론(?)을 온몸으로 받았다.

2-3으로 아깝게 패했던 독일전 이야기는 앞서 하석주, 황선홍 감독에 이어 허정무(65) 대전 하나시티즌 이사장에게도 들은 바 있어 서 감독에게는 깊이 묻지 않았다. 서 감독은 하프타임에 교체로 들어갔다. 서 감독은 "독일전은 진짜 아까웠다. 우리에게 시간만 더 있었으면 이겼다는 가정에 동의한다"는 말로 정리했다.

4년 뒤 1998 프랑스월드컵은 큰 무대에 눈을 뜬 서 감독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스트라스부르(프랑스)에 진출해 제대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시즌 12경기 4골을 넣었고 '세오(SEO)'라는 별명도 여기서 붙었다.

"프랑스월드컵은 제게 한(恨)으로 남아 있어요.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월드컵을 앞두고 프랑스에 있었고 괜찮은 활약을 했거든. 그래서 관심을 크게 받았는데 하필 월드컵 가기 전 외박에서 수두에 걸려 있던 첫째 아들을 안아줬다가 저도 똑같이 걸린 거에요. 그래서 비행기에서도 격리되고 프랑스에 도착해서도 혼자 방을 썼어요. 수두는 운동하면 안되고 땀도 흘려서는 안 되니까 격리됐죠."

아무 준비도 하지 못했던 서정원은 멕시코와 1차전 후반 25분, 고종수(41)와 교체로 그라운드에 나섰다. 그렇지만, 이미 1-3으로 뒤집히고 하석주까지 퇴장당한 상황에서 할 것이 없었다. 몸도 무거웠고 뛸 힘도 없었다.

"멕시코전은 동료들도 알고 있지만, 모든 프랑스 매체가 경기 홍보는 제 얼굴로 했어요. 호르헤 캄포스 골키퍼와 저의 1대1 겨루기라고 나와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만약이지만, 제가 수두에 걸리지 않고 정상적으로 출전했다면 하 감독도 퇴장당하지 않고 괜찮게 경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흐름이 나쁘게 갔고 네덜란드와 만나 크게 졌으니까요. 네덜란드는 그 세대가 정말 좋았거든요. 하필 그때 우리가 만난 거에요."

두 번의 월드컵을 경험했지만,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안방에서 치르는 2002 한일월드컵은 서 감독에게 기회였다.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다. 30대 초반이었지만, 얼마든지 경쟁력을 보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당연히 한국에서 하니까 출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워낙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가 서서히 좋아지고 있는 과정이었기에 조심스러웠어요. 아마 거스 히딩크(74) 감독도 오고 나서도 예전에 내가 했던 것들이 있어서 대표팀에 계속 부르지 않았나 싶었어요. 몸도 좋아지고 있었으니까요.  대표팀에 계속 있다가 한 번 팀으로 돌아왔었거든. 수원 삼성에서 아시아 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도 출전했는데 정말 잘했어요. 그러고서 다시 대표팀으로 돌아왔죠."

▲ 1994 미국월드컵을 앞뒀던 풋풋한 20대 중반의 서정원

"2002 한일월드컵 미련 없어요, 오히려 2006 독일월드컵 당시 몸이 더 좋았으니까요"

서 감독의 공식 기록은 2001년 4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있었던 LG컵 4개국 친선대회가 마지막이었다. 그해 9월 나이지리아와 두 차례 평가전이 대전과 부산서 있었는데 후보 명단에만 있었을 뿐, 출전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때 제가 선발 출전한다는 기사가 신문 1면에 나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1차전은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도 2차전을 하니까 나가겠지 생각했고 준비하라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런데 나오지 않았어요. 그렇게 하고 수원으로 복귀하니 김호(76) 감독님이 완전 화가 나서 '너 너는 대표팀에 가지 마라'라고 하시더니 축구협회에 전화를 걸어서 '서정원이 뽑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제 생각에 히딩크 감독은 저를 계속 데리고 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쩌겠나요. 그렇게 큰 미련은 없더라고요. 실력 좋은 후배들이 많았으니 괜찮았어요."

하지만, 십자인대 파열 부상 후유증은 꽤 오래갔다. 차라리 뽑히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30대 중반을 넘어가던 2006 독일월드컵 당시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회춘한 실력을 보여줘 '대표팀에 와야 하나'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SV잘츠부르크(현 레드불 잘츠부르크)와 SV리트에서 뛰면서 현지 적응에 문제도 없고 오스트리아 언론 선정 2005년 최고의 선수로 뽑히는 등 시쳇말로 '날아다녔기' 때문이다.

"만약 다치지 않았었다면 (2002 월드컵에) 당연히 나가지 않았을까요. 십자인대가 끊어지고 고생했기 때문에 (안 나갔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오히려 몸은 2006년에 더 좋았죠. 나이가 많았지만, 몸이 너무 좋았어요. 오스트리아 리그에서 뛰면서 얘네들은 한 수 아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생각하는 대로 다 되니까요. 그래서 장난으로 제자 (황)희찬이에게 '36경기를 뛴다고 치면 난 25경기에서 베스트11이었다'고 했었어요. 실제로 그랬거든요. 그해 오스트리아 리그 외국인 최우수선수(MVP) 1위였으니까요. 요즘에는 스포티비에서 오스트리아 리그도 중계하잖아요. 만약 그때도 지금처럼 중계가 있었다면 저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했을까 싶어요."

충분히 입맛을 다시고도 남을 과거였다. 그에게는 바르셀로나(스페인), 벤피카(포르투갈), FC쾰른(독일) 등 명문 팀으로의 이적 무산이라는 아픔이 있었기에. 


스포티비뉴스=김건일 기자 이성필 기자


<②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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