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탑골을 통해 새삼 주목받는 권상우와 김영철, 전광렬(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유수빈(왼쪽 아래)는 '사랑의 불시착'에서 소라게를 패러디했다. 방송화면 캡처

[스포티비뉴스=강효진 기자] 철 지난 콘텐츠들이 2020년 다시 유행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20, 30년 전 방송됐던 영상들이 유튜브를 통해 재생되면서 '탑골OO' 타이틀을 달고 부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90년대 가수 양준일은 '탑골 지디'(탑골 지드래곤)로 불리는 대세 스타로 거듭났다. 배우 김영철은 20년 전 드라마 대사로 CF를 찍게 됐다. 온라인에서 재미삼아 시작된 '놀이'가 오프라인에서 기적을 만든 셈이다.

이제 '탑골'이라는 단어는 '노년층이 방문하는 공간' 대신 밀레니얼 세대에게 '힙'의 상징이 되고 있다. '탑골' 콘텐츠는 어디서부터 왔고, 1020 세대는 왜 철 지난 '탑골' 콘텐츠에 열광하는 것일까.

◆'탑골 콘텐츠'의 시작은

'탑골'은 서울 종로에 위치한 탑골공원에서 따온 표현이다. 노년층이 소일삼아 즐겨 찾는 공간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거리감 있어 보이지만,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들에겐 '요즘 언어'가 됐다. 

젊은 시절 지드래곤을 닮은 외모를 가진 가수 양준일은 '탑골 지디'로 불린다.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화제를 모았던 테크노 여전사 이정현은 '탑골 레이디가가', 댄스 디바인 백지영은 '탑골 청하', 한국의 리키 마틴으로 불렸던 홍경민은 '탑골 리키마틴'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백지영은 이후 여러 방송을 통해 "'탑골 청하'라는 별명은 너무 좋은 평가다. 여자 솔로가수 중 가창력과 댄스 모두 가능한 것은 청하다. 21세기 백지영의 모습이다"라고 만족스러움을 표하기도 했다.

'탑골' 시리즈의 유행은 지난해 8월 유튜브 SBS 클래식 채널에서 시작됐다. 이곳에서 송출한 90년대 '인기가요' 스트리밍 서비스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입소문을 탔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재미에 한때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시 시청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스트리밍 채팅창에서는 누리꾼들이 90년대 가수들의 당시 스타일, 인지도, 인기를 최근 활동하는 스타들에 비유하면서 '탑골 OO'라는 유쾌한 별명들이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탑골 가요'를 통해 과거 인기 가수들이 재조명 받았다. 돌고돌아 2019년의 스타일과 코드가 맞아떨어져 스타덤에 오른 양준일, 현재는 배우로 전향한 샤크라 려원, 핑클, 베이비복스 등 '무한도전-토토가'로 미처 만나지 못한 이들의 풋풋했던 신인 시절이 색다른 재미를 넘어 신선한 층격을 줬다. 

당시 '인기가요' MC 김소연 역시 변함없는 비주얼과 놀랄만큼 똑 부러진 진행력으로 눈길을 끌었고, 활동이 뜸한 김진 등 과거 인기스타들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반응도 뜨거웠다. 또한 스트리밍 방송이 2000년대에 진입하면서 K팝 한류의 시초가 된 보아의 데뷔 무대를 손꼽아 기다리는 시청자들의 반응도 흥미로운 풍경이었다.

▲ '탑골 지디'로 큰 인기를 누리는 양준일.ⓒ곽혜미 기자

◆탑골 가요→탑골 시트콤, 인기 바통터치

탑골 가요 이후에는 탑골 콘텐츠의 인기로 번졌다. MBC '오분순삭' 채널을 필두로 각 방송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콘텐츠가 주목 받으며 옛날 인기작들이 재조명 되기 시작했다. TV에서 유튜브로 채널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과거 방송 당시 큰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시트콤, 예능 프로그램 등이 어린 세대들에겐 새롭고 신선한 콘텐츠로 소비되고 있다.

해당 채널은 단순히 지난 방송분을 통째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3~5분 가량의 짧은 호흡으로 재편집해 유튜브 유행 문법에 맞게 업로드 하고 있다. 트렌디한 자막이 더해진 재활용 콘텐츠들은 1020 세대가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 회자되며 폭발적인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또한 해당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접했던 세대에게도 추억의 콘텐츠로 관심을 모았다.

덕분에 오래 전부터 아는 사람만 알던, '밈'(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행동이나 말 등을 모방해 만든 사진이나 영상)으로 굳어진 특정 캐릭터들의 유명 대사나 장면의 원본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돼 점점 더 많은 이들의 공감과 웃음을 끌어내고 있다.

MBC 유튜브의 대표 콘텐츠는 당시 신드롬급 인기를 모았던 시트콤 '하이킥' 시리즈다. 지난 2018년 7월부터 '오분순삭' 타이틀로 업로드된 '지붕뚫고 하이킥' 재편집 시리즈는 편당 수십에서 수백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시트콤 트렌드를 이끌던 시기 김병욱PD의 작품들이 웃음 강도가 높고, 에피소드의 재미, 캐릭터가 탄탄한데다 콘텐츠 길이가 짧았던 것이 주효했다. 시트콤이 멸종하다시피 한 요즘에는 이같은 포맷이 신선하게 느껴질 뿐 아니라, 길이감도 온라인 콘텐츠로서 적합했던 덕분이다.

한 방송 관계자는 "관련 업무를 하다보니 평소 주변인들에게 연예인 사인 요청을 자주 받는 편이지만, 최근에는 10대 조카들에게 K팝 아이돌 스타가 아닌 '하이킥' 출연진의 사인을 받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놀랐다"며 "10대들 사이에서 옛날 시트콤이나 예능 프로그램 다시보기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고 귀띔했다.

▲ 신세경(왼쪽), 정보석. '오분순삭' 유튜브 캡처

SBS에서는 SBS NOW 채널을 통해 '레전드 시트콤'으로 꼽히는 '순풍 산부인과' 인기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그 중 가장 화제를 모은 '미달이 방학숙제 편'은 조회수 396만을 기록했다. 박미선의 유행어 'OO는 내가 할게, OO는 누가 할래?'도 이 에피소드에서 탄생한 것이다. 흐름에 발 맞춰 KBS 역시 지난해부터 유튜브 채널 '깔깔TV'를 통해 '공포의 쿵쿵따', '상상플러스', '1박2일' 등 과거 인기 예능 프로그램 에피소드를 업로드 중이다.

'오분순삭'을 비롯해 MBC 디지털 콘텐츠를 총괄하는 김영규 MBC 디지털제작1부장은 '하이킥' 시리즈 등 옛날 콘텐츠이 다시 인기를 얻는 현상에 대해 "기본적으로 예전 PD들이 만들어놓은 원 소스가 워낙 좋았다"고 짚으며 "콘텐츠를 가공하고 있는 팀원들이 2020년에 맞게 재해석한 덕도 있다고 본다. 자막이나 편집된 요소를 같이 접하게 되면서 웃음 포인트가 된 부분이 크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옛날 콘텐츠들 중에서도 캐릭터가 살아있는 콘텐츠들이 성공하고 있다. 내용이 전체적으로 재밌다고 반응이 잘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하이킥' 시리즈 중에서도 방영 당시 시청률이 더 높은 작품은 '거침없이 하이킥'이었지만, 재편집 업로드 용으로는 캐릭터들의 개성이 선명한 '지붕 뚫고 하이킥'이 더욱 적합했고 실제로도 더 좋은 반응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또한 '재활용 소스가 되는 구작 소진 이후 채널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구작은 꾸준히 쌓이겠지만 또 어떻게 재해석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 MBC '오분순삭' 콘텐츠. 유튜브 '오분순삭' 페이지

◆패러디 밈, 부끄러운 흑역사→제2의 전성기 터지는 '복권'

이런 추세 속에서 최근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스타들이 과거 출연작의 캐릭터로 어필하는 사례가 생겼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해도 정극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과거 출연작이 인터넷 패러디 소재로 쓰이는 것을 '흑역사'로 여기는 분위기가 짙었다. 

몇년 사이에 흐름이 달라지면서 이제는 스타들도 대응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인터뷰 현장이나 방송, 공식 석상에서도 흑역사로 치부되던 밈이 언급되기 시작했고,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팬들의 관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유행을 함께 즐기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그 중 몇몇 배우들은 직접 과거 연기를 재조명하고 1020 세대로부터 호감과 새로운 화제성을 얻으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권상우는 드라마 '슬픈연가' 속 '소라게'로 불리는 이별 신을 MBC '라디오스타'에서 2020년 버전으로 패러디해 큰 화제를 모았다. 해당 장면은 지난 16일 종영하며 tvN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을 경신한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 패러디 신으로도 삽입됐다. 극 중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북한 병사 김주먹(유수빈)이 톱스타 최지우를 만난 자리에서 권상우의 '소라게' 신을 따라한 것이다. '천국의 계단' 속 장면은 아니었지만, 남자 주인공이 권상우라는 점에서 묘하게 두 작품이 매시업 되면서 2020년 작품인 '사랑의 불시착'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큰 웃음을 주는 특별한 신으로 남게 됐다.

▲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소라게 신을 패러디한 유수빈. 방송화면 캡처

김영철은 '태조 왕건' 속 궁예의 대사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와 '야인시대'의 '사딸라'(4달러)로 재조명 받으며 광고 촬영, 예능 프로그램 출연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최근 '라디오스타'에서 "최근 음반 시상식에서 '사딸라'를 외쳤더니 젊은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며 인기를 체감한 에피소드를 언급하기도 했다.

풍부한 감정연기로 출연작 캡처들이 '온라인 짤'로 많은 화제를 모았던 전광렬은 '제빵왕 김탁구'에서 크림빵을 먹는 신을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통해 재현하는 등 자신의 연기력을 활용해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전하는 동시에 뛰어난 연기력을 새삼 각인시켰다.

개그맨 박미선 역시 SBS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 시절 캐릭터로 최근 10대들에게 뜨거운 인기를 모으고 있다. 또한 배우 신세경의 유튜브 채널에도 뒤늦게 '하이킥'을 보고 빠져든 팬들이 줄줄이 시트콤 속 캐릭터 말투를 본딴 패러디 댓글을 달아놓을 정도다.

▲ 옛날 콘텐츠로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스타들. 방송화면 캡처

◆"뉴트로 트렌드, 세대간 소통…새로운 콘텐츠도 발굴해야"

콘텐츠 소비가 빠르고 유행이 빠르게 흘러가는 요즘, 탑골 가요에서 탑골 시트콤으로 이어지는 탑골 콘텐츠의 재조명 열풍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잘 만든 콘텐츠는 20년을 간다'는 점에서 웰메이드 콘텐츠에 대한 재평가의 장이 될 뿐 아니라, 10대부터 중년층까지의 세대 통합의 공간으로 의미를 갖게 됐다. 이들이 하나의 콘텐츠를 중심으로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소통거리가 만들어진 것이 유의미한 가치다.

반면 이같은 현상에 대해 2020년인 현 시대를 대표하는 콘텐츠가 부족하기 때문에 철 지난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아쉬움도 주목해야 할 의견이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뉴트로 콘텐츠의 재조명은 세대간의 소통거리가 만들어졌다는 측면에서 큰 장점이다. 기성 세대들은 옛날 생각을 하며 보고, 젊은 세대는 새롭다는 생각으로 보게 된다. 하나의 콘텐츠를 동시대에서 소비한다는 건 세대 교류 가능성이 생길 수 있어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TV를 거쳐간 콘텐츠가 그대로 쓸모를 잃고 잊히는 것이 아닌 온라인을 통해 생명력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요즘의 '탑골' 열풍과 '탑골' 콘텐츠 활용법은 향후 종영한 TV콘텐츠의 재활용 가이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정덕현 평론가는 "(현재의 뉴트로 유행이)지속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콘텐츠라는 것이 한정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새로운 것들이 발굴되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려울 수도 있다"면서 "중요한 것은 이런 뉴트로 트렌드가 나온다는 건 현재 부족한 어떤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를 채워줄 수 있는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해서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이다"라고 덧붙였다.

스포티비뉴스=강효진 기자 bestest@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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