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마포구 소재 엘후에고에서 축구 주기화 3일 코스 강연을 진행한 레이몬드 베르하이옌 전 한국 대표팀 피지컬 코치 ⓒ한준 기자


[스포티비뉴스=합정동, 한준 기자] 21세기 한국 축구의 월드컵 성공기 이면에 '저승사자'로 불렸던 피지컬 코치 레이몬드 베르하이옌이 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4강)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 2006년 독일 월드컵(1승 1무 1패)에서 딕 아드보카트 감독과 함께 했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16강)을 앞두고도 한국 대표팀에 합류한 베르하이옌 코치는 한국 선수들의 체력 수준을 최고로 만들었다. 

이 세 번의 월드컵에 참가했던 이영표는 월드컵을 치르며 몸이 가벼웠다고 회고했다. 베르하이옌이 함께 하지 않은 최근 두 차례 월드컵에서 체력적 어려움을 겪으며 조별리그 탈락을 경험했다. 

토탈 풋볼의 아버지로 불린 리뉘스 미헐스가 참여한 네덜란드축구협회 교류 시스템의 연구원이자, 네덜란드 풋볼 아카데미의 강사로 활동한 베르하이옌은 한국 대표팀뿐 아니라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루이 판할 감독 시대의 네덜란드 대표팀, 히딩크 감독의 러시아 대표팀에서 일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준우승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외부 컨설턴트로 일하는 등 세계 축구 최전선에서 활동해왔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선 독일을 탈락시키고 16강 진출을 이룬 멕시코 대표팀의 컨설턴트로 일했다. 

▲ 루이 판할 감독의 네덜란드 대표팀 스태프로 일했던 베르하이옌


베르하이옌은 최근 월드 풋볼 아카데미의 디렉터로 일하며 전 세계를 돌며 축구 주기화 방법론을 전수하고 있다. 지난 10일부터 12일까지 서울 마포구 독막로에 소재한 문화공간 엘후에고에서 한국 지도자 50여 명을 대상으로 처음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K리그1, 2에 속한 22개 팀의 50명과 더불어 개별적으로 지원한 에스토니아 19세 이하 대표팀 감독, 브루나이 축구 지도자 등이 베르하이옌의 노하우를 배웠다. 

베르하이옌의 축구 강연은 한국에 세계축구의 담론과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는 축구싱크탱크 후에고가 추진해 한국프로축구연맹과 협력해 개최할 수 있었다. 축구의 중심인 유럽과 남미는 물론 미국, 뉴질랜드, 호주 등지에서도 베르하이옌의 강연은 인기다. 세 차례나 한국 대표팀과 월드컵을 함께 한 베르하이옌은 "한국 선수들의 열정적인 자세는 언제나 최고의 기억이다. 한국축구와 좋은 인연을 맺었고, 지도자들과도 일해보고 싶다"며 기꺼이 한국을 찾았다. 

선수들로부터 혹독한 체력 훈련으로 인해 '저승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베르하이옌은 강연에서도 매우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여러분이 선수들에게 원하는 자세를 보여라"라며 강연에 임하는 자세와 행실에 대해 지적하며 100% 이상의 집중과 열의를 요구했다.  

"내가 여러분의 감독이고, 이곳은 나의 드레싱룸"이라며 축구팀과 같은 규율을 요구한 강의 세션의 첫 시간은 휴식 시간 없이 3시간 가까이 이어지며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을 요구하기도 했다. 많은 축구 세미나와 강연이 강사의 일방적 강의를 듣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 조는 이들이 속출하는 루즈한 분위기다. 베르하이옌의 강연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이 강연을 듣는 모든 이들의 수준을 높이고 싶다. 나는 최고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 베르하이옌은 3일간 짧은 코스였지만 지금까지 한국에서 진행된 축구 강연 중 최고 수준의 긴장감을 선보이며 한국 축구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젊은 지도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갔다. 2017년 유로파리그에 참가했던 아약스의 실전 케이스를 비롯해 축구 주기화를 적용한 체력, 전술, 기술 등 상세 훈련법 등 실제적 정보까지 전하며 유럽 축구 최신의 방법론을 전수했다.

▲ 레이몬드 베르하이옌 월드 풋볼 아카데미 디렉터


◆ 스스로 생각하라, 선수들에게 모범이 되어라

베르하이옌은 3일간의 코칭 일정 중 첫날에 태도와 자세, 의지, 개념 등 기본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코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규율 잡힌 행동이다. 아이는 부모의 모든 것을 보고 배운다. 선수들도 코치의 모든 것을 보고 배운다. 선수들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많은 축구 지도자들이 나쁜 롤 모델로 행동하고 있다."

베르하이옌은 선수들이 따르도록 하기 위해선 지도자가 모범이 되어야 하고, 더 높은 위치로 갈수록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선수 시절 경험,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끊임없이 축구계 최신 지식을 습득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유소년 코치 때는 열심히 하고, 1군 수석 코치가 되도 어느 정도 하지만 감독이 되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행동한다. 99%, 98%, 97% 점점 떨어진다. 전 세계에서 똑같이 발견되는 모습이다.  감독들은 낮은 레벨의 지도자들처럼 배우려 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져버리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베르하이옌은 감독이 잔소리꾼이 되어선 안 되며, 상황을 제시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몸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아주 느리게 주워서 느리게 테이블에 두는 행동을 한다면? 내가 천천히 하는 이유는 보여주기 위해서다. 롤 모델 행동을 한 것이다. 난 절대 선수들에게 청소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시하지 않고 보여준다. 이것을 상황 코칭이라고 한다. 말로 코칭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만들어서 코칭해야 한다." 

▲ K리그 1, 2소속 코치들에게 서울에서 첫 축구 주기화 강연을 진행한 레이몬드 베르하이옌 ⓒ한준 기자


◆ 선수 탓, 심판 탓은 나쁜 지도자…경험 아닌 팩트로 솔루션 찾아라

베르하이옌은 강연을 듣는 지도자들에게 여러 나쁜 사례를 들며 "이런 행동은 아마추어"라고 지적했다. 경기를 마치고 심판 탓을 하거나 선수의 탓을 하는 감독은 나쁜 지도자라고 일갈했다.

"내 방법은 옳아. 저번 시즌에는 이렇게 해서 우승했는데, 올 시즌은 선수들이 문제야. 심판이 문제야. 어린 선수들이 강하지 못해. 이런 말과 행동은 감독의 생각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밝히는 게 과학자의 일이다."

아르센 벵거 전 아스널 감독을 비롯해 함께 일했던 루이 판할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최근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위르겐 클롭 리버풀 감독을 '선수의 부상 리스크를 높이는 훈련을 하고 있다'며 거침없이 비판했던 베르하이옌은 축구계에도 과학계처럼 잘못된 방식에 대한 비판과 그를 통한 개선과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설을 실험했는데 틀렸을 때, 가설이 틀린 게 아니라 실험이 틀렸다고 하면 발전이 없는 것이다. 발전을 위해 비판이 필요하다. 내가 선수였을 때 이랬다. 5년 전 지도자였을 때 이렇게 우승했다. 이러한 것들은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다. 5년 전에 진실이었을 수 있지만, 그가 선수 시절에 맞았을 수 있지만, 그 해에, 그 팀에, 그 상대 팀에 맞았겠지만, 오늘은 맞는 게 아니다. 과거를 말할 때 조심하라. 주관적 경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조심하라. 라커룸에서 똑같이 상황을 다뤄야 하는데, 의견이나 경험이 작동했을 때, 반응을 보라. 그가 의견으로 이해 반응했다면, 과거 경험으로 반응했다면, 주관적 경험으로 반응한다면, 다음 달에 어떤 위험이 있겠나. 똑같은 상황에서 라커룸에서, 같은 상황에 한 달 뒤에 다른 의견을 낸다면 어떨까? 코치가 그날그날의 느낌에 따라, 직감이 달라서, 같은 상황에 대해 다른 방식을 말한다면 선수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나? 비지속적, 예측불가능한 지도자를 선수들이 따를까? 지도자는 선수들에게 신뢰 가능한 정보를 줘야 한다."

베르하이옌은 어린 선수를 기용한 뒤 결과를 내지 못한 상황에서 선수를 비판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어린 선수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코치는 변명하는 것이다. 그 선수가 더 발전되게 해야 한다. 비난은 쉽다. 변명하는 코치는 나쁜 코치"라며 비판했다.

▲ 베르하이옌과 통역을 맡은 김주표 수원 삼성 U-18 피지컬 코치(오른쪽)


◆ 패배의 원인은 먼저 전술에서 찾아야 한다

베르하이옌은 축구 경기를 구성하는 레퍼런스는 여럿이지만 지도자가 결과를 분석할 때는 항상 전술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축구는 팀 스포츠인가, 개인 스포츠인가? 테크닉은 개인의 특성이고, 전술은 팀의 특성이다. 첫 번째는 항상 팀 수준에서 분석해야 한다. 축구는 전술을 먼저 분석해야 한다. 1차 분석은 선수 사이에 어떤 미스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는지 봐야 한다. 개인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두 번째다. 즉각적으로 선수 개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축구를 개인 스포츠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베르하이옌은 전통적 축구 레퍼런스 자체를 비판했다. 축구를 구성하는 요소를 기술(technique), 전술(tactics), 체력(physical), 정신력(mental)으로 구분하는 것은 실체적이지 않고 모호하다는 것이다. 

"기술이 좋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 패스는 정확한데 볼 콘트롤은 부족하면 기술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기술은 더 세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전술적으로 뛰어난 선수는 무엇인가? 전술은 팀의 영역인가, 개인의 영역인가? 정신력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나?"

베르하이옌은 축구 레퍼런스로 의사소통(communication), 의사 결정(decision making), 판단의 실행(execution) 그리고 축구 체력(football fitness)의 네 가지를 꼽았다. 전술은 커뮤니케이션에 해당한다.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수와 선수 간 소통이 잘되어야 전술이 구현된다. 베르하이옌은 "전술적으로 강한 개인은 없다. 전술적으로 강한 팀만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전술은 서로 일하는 것이다. 의사 결정은 경기 안에서 선수의 개인 통찰력에 해당한다. 경기 상황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다. 전통적 레퍼런스에서 말하는 기술은 전술적 판단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기술 그 자체는 의미가 없다. 전술을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90분 동안 빈번하게, 오래 할 수 있는 '축구 체력'이 있어야 한다. 단지 오래 달릴 수 있다면 축구 체력이 아니다. 무거운 것을 들 수 있는 것은 근육 체력이다. 풋볼 액션을 자주, 오래 할 수 있는 게 '축구 체력'이다."

결국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전술을 구축하고, 그 전술을 구현할 수 있는 체력을 만드는 것이 감독의 일이고,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면 실행하지 못한 선수를 탓하기에 앞서 구현에 실패한 감독에게 1차 책임이 있다. 베르하이옌은 그 점을 간과한 패배 원인 분석을 모두 아마추어적인 감독의 변명이라고 지적했다.

◆ 정신력 문제는 핑계, '축구 체력'을 개선하라

베르하이옌이 가장 크게 지적한 것 중 하나가 축구 경기에서 정신력을 두고 선수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베르하이옌은 "우리 선수들은 정신적으로 약하다. 이게 무얼 의미하나. 말은 하지만 어떤 의미도 없고 누군가를 비난할 뿐이다. 일방적이고 비맥락적이다. 정신적으로 약하다고 하면 어디서 잘못됐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나?"라며 결국 훈련 과정의 문제, 전술의 문제로 인해 선수들이 제대로 경기를 하지 못하는 상황을 야기한 축구 체력의 문제를 잘못 설명한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축구 체력은 축구 안에서 체력의 맥락이다. 이 팀은 핏(fit)하지 않아, 정신이 약해. 샤프(sharp)하지 않아. 자신감이 없어. 이건 헛소리다. 말은 하지만 의미가 없는 이야기다.  마치 축구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면서, 축구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피치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묘사하고 있지 않다. 말은 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어떤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베르하이옌은 경기 결과를 분석하면서 추상적인 단어는 복기와 분석, 개선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정신력은 결국 뇌의 체력을 의미하며, 선수들이 강한 뇌를 갖도록 평소 훈련장에서 훈련시켜 강하게 만드는 것이 축구 코치의 일이라고 했다. 축구 심리학자의 필요성보다 훈련 중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피지컬 전문가로 알려져있지만, 피지컬에 전문성을 가진 축구 코치라고 강조했다. 결국 축구 경기를 위한 모든 훈련은 축구 훈련 안에서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축구 체력 훈련은 오직 축구 훈련 안에서 이뤄진다. 이것은 내 의견이 아니라 팩트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축구를 하지 않는 운동을 한다면, 축구 맥락 밖에 있는 운동이다. 그것은 비축구 체력 훈련이다. 축구하는 것 같은 체력 훈련, 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축구 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축구 체력 코치가 아니다. 비 축구 체력 코치다. 가능한 한 빠르게, 가능한 한 오래, 90분 간 축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축구 체력이다. 소통하고 판단하고, 판단을 실행하고, 이 축구 액션을 자주, 하이 템포로 하는 것, 이것을 90분 동안 유지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축구 체력이다."

▲ 서울 엘후에고에서 열린 축구 주기화 훈련에 참가한 K리그 1,2 지도자들


◆ "영어 공부하라" 한국 지도자들, 축구계 최신 지식 습득해야

베르하이옌의 강연은 2015년부터 전 유럽에서 진행된 그의 강의에 매년 참가했던 김주표 현 수원삼성 18세 이하 팀 피지컬 코치가 진행했다. 그 이전 강의를 들었던 이재홍 전 국가대표팀 피지컬 코치로 이날 강연에 함께 했다. 통역을 거쳐 강연하면서 직접적 소통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 베르하이옌은 한국 지도자들에게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1년 뒤 다시 강연을 하러 한국에 온다면 통역 없이 강연할 수 있는 상황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여러분 직업에서 대부분의 지식은 영어로 쓰여 있다.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직업에 관련된 지식 대부분에 접근할 수 없다. 이것을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100% 자기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최고라면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영어로 말하고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가능한 정보를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100%를 선수들에게 원한다면 나 역시 100%가 돼야 한다.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여기 50명의 한국 코치가 여기 있는데, 65세 코치도 있을 수 있다. 여러분이 65세라면, 그 이전 세대라면, 인터넷도 없고 영어 교육이 없던 시대의 사람이라면 이해한다. 하지만 여러분은 대부분 어린 코치이고 다음 세대의 코치다. 인생 대부분을 인터넷이 있는 시대에 살았다. 영어를 못 한다는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일이다."

스포티비뉴스=합정동, 한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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